지리산과 함께

지리산을 보며

시인의 집

방산하송 2013. 9. 30. 10:43

얼마 전이다. 이른 아침 누군가 문을 두드려 나가 보니 낯선 여자가 나무 작업을 하러 왔다고 했다. 집을 잘못 찾아온 것 같다고 했더니 미안하다며 뒤돌아 나가다 말고 웃으면서 하는 말이 '시인의 집 같군요.' 했다. 그래요? 하고 말았지만 갑자기 잠재 되어 있던 무엇인가가 되살아나는 듯 했다. 사실 오래전부터 나는 시인의 마음으로 살고 싶다는 희망을 내심 품고 있었다. 무슨 시를 쓰고 문학적 성취를 이루겠다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시인의 마음으로 주변을 대하며 같이 어울려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오고 있었던 터였다. 

 

시인이란 일상의 대상이나 행위를 통해서도 그것이 가지는 본질적인 의미를 찾아내어 함축된 언어로 드러내는 사람이며, 현실적인 어려움이나 아픔, 흔들림도 삭이고 녹여내어 우리가 염원하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시인의 마음이란 주변의 현상이나 사물을 곧이곧대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감춰져 있는 보다 본질적인 요소를 찾아내어 그 대상을 더 잘 이해하고 싶다는 것이며, 좀 더 따뜻하고 너그럽게 세상을 보고 사물을 대하며, 작고 여린 것들의 벗이 되어 함께 하고 싶다는 의미이다. 어떤 현상의 실제보다는 원인과 인과성에 더 주목하고 싶다는 말이기도 하다.

 

한 때 정태춘의 '시인의 마을'을 즐겨 노래한 적이 있다. 그 운율과 가사가 마음에 들어 자주 불렀는데 그 때의 느낌과 감정은 아직도 살아있다. 끊기지 않는 상념과 고행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따뜻하게 세상을 관조하는, 그런 넓은 마음과 눈을 가진 사람을 꿈꾸었던가 보다. 나의 희망이면서 동시에 나의 부족한 점에 대한 반성이기도 했다. 보통 사람들로서는 별 시덥잖은 소리로 들릴지 모르고 다소 허황된 꿈인지도 모르나 사람마다 생각과 지향이 다르니 나 같이 나이가 들어서까지 덜 떨어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시인의 마을이란 젊은 시절 나의 이상향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도 늘 그런 생각을 마음에 품고 있었던지라 은연중에 그런 분위기가 혹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언감생심 시인이라는 것 자체가 가당치도 않으니 그 여인이 무엇을 보고 시인의 집 같다고 했는지는 모르나 외양으로 비춰진 집이란 실상 본질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나는 내 의지대로 그런 바램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런 분위기를 염두에 두고 집을 가꾸거나 농사를 짓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논에다 집을 앉혔으니 내 취향껏 열심히 주변을 정리하고 다듬었을 뿐이고, 제대로 농사를 지어 본 경험이 없으니 조금이라도 낭패를 덜해보려고 부지런히 땅을 파고 심고 가꾸었을 뿐이다. 이런 나를 보고 바람골 위쪽에 사는 박진철이라는 사람은 툭하면 성질이 별난 사람이라고 핀잔을 한다. 늘 일만 한다는 것, 밭을 너무 반듯하고 깨끗하게 가꾼다는 것, 술 마시고 고기 굽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 등이 그 이유다. 다른 사람보고 별나다고 한다면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전제가 있을 터, 적당히 일하고 친구 좋아하고 고기 굽고 술 마시기 좋아하고 시골에 들어왔으니 좋은 것 찾아 먹으며 즐기면서 사는 것이 자신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나는  속으로 웃고 말지만 내가 보기에 그 사람도 별나다. 

 

사람마다 별난 구석이 있게 마련이다. 자신의 생각이나 취향과 다르다고 해서 별나다고 한다면 세상사람 중에 별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며 또 한편으론 한 구석도 별난 부분이 없다면 어찌 제대로 된 사람이겠는가? 내 스스로도 자신이 별난 구석이 많다고 생각 할 때가 있다. 다소 고지식하고 원칙 주의적이며 호불호가 뚜렸하고 옳고 그름에 대한 입장이 분명하다. 잘못이 있을 땐 인정하지만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 약간의 권력이나 지위, 돈, 예술이나 학문적 성취에 기반 한 허위의식을 대단히 경멸한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지적, 예술적 열등감으로 인하여 통속적인 것은 애써 외면하는 이중성을 보이기도 한다.

 

무엇보다 무슨 일을 할 때 마냥 게으름을 피우다가도 한 번 시작하면 마음에 찰 때까지 손을 놓지 못한다. 사람도 한 번 눈에 벗어나면 두 번 다시 돌이키기 어렵다. 단정적이거나 경박한 행동을 보면 참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특히 자신의 입장만 주장하거나 무례하거나 이기적인 부분이 보이면 가차없이 등을 돌리고 만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따뜻함이 부족한 것이다. 그러니 별스럽다기 보다 어찌 보면 까다로운 부분이 많은 것이다. 남들이 하는 데로 잘 하지 않거나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의식적으로 피하는 경향이 있으니 이것은 천성인지 모르겠다. 이런 까칠한 성격으로 인하여 주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으니 좀 별스럽다는 소리를 들을 만도 하다. 그렇지만 지금껏 남에게 피해를 준다거나 누굴 속이면서 일을 도모해 본 적이 없다. 남에게 무슨 일을 강요하거나 끌어들이는 경우도 드물다.

 

애초에 사람이 많고 번잡한 것 자체를 영 싫어하는 성미인 것이다. 그래서 이런 곳에 혼자 들어와서도  잘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여인이 생각한 것처럼 시인도, 시인과 같은 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고 박진철씨나 동네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죽자살자 일만 하거나 집을 가꾸고 밭을 정리하는 데 유달리 집착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나이들어 평소의 희망대로 시골에 들어와 자연스런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며, 나의 생활이 나의 희망과 꿈에 충실해지도록 열심히 땀을 쏟는 것일 뿐이다. 

 

손에 전해지는 부드러운 흙의 감촉을 느끼고, 강렬한 햇볕 속에 드러나는 자연의 생명력에 감탄하며, 풀과 함께 내 사상의 텃밭을 일구고, 비와 바람과 일상의 모든 것에 감사하며, 그 속에서 곡식이 자라고 커서 열매를 맺는 과정과 또 그것이 곧 온 우주의 순리임을 깨닫으며 시인의 눈과 마음으로 살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비록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하고 또 생산적이지 않다고 해도 이제는 내 자신의 희망과 기준대로 인생을 살고 싶은 것이다.

 

이미 상당한 부분 그런 생활이 몸에 베어가고 있고 가끔은 나에게 이런 기회와 삶이 주어진 것에 대해 무한히 감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시적 분위기가 풍기는 그럴듯한 집, 아름다운 나무와 꽃밭, 잘 키운 곡식들이라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껍데기일 뿐이다. 우리는 무엇이든 영원히 소유하지는 못한다. 아니 근원적으로는 자기 외에 아무것도 자신의 소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제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고 해도 한 철을 넘기지는 못하니, 시간의 길고 짧음 그 차이일 뿐 결국 우리가 돌아가야 할 때 지상의 그 어떤 것도 길동무나 위로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저녁이면 벌써 공기가 선들하고 차다. 쓸데없이 시골 가로등이 밝아도 밤하늘은 맑고 별과 은하수는 총총하다.

 

 

가을 초입에 서서.   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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