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 날씨가 화창하다. 어제 저녁에 만들어 거실에 놓아두었던 메주를 잘 마르도록 햇볕이 좋은 마루에 내다 놓았다. 적당히 마르면 망에 담아 하우스 안에 매달아 놓으면 된다. 지난 주 김장을 끝내고 수돗가에 내 놓았던 큰 플라스틱 통과 체반, 메주 쑤었던 그릇 등을 씻고 미뤄둔 뒤치다꺼리를 한 뒤 점심을 먹었다. 이것저것 정리하고 오후 늦게 어지간히 메주가 마른 것 같아 짚을 감고 망에 담아 하우스 안 대들보에 매달았다. 큰 일을 하나 마무리 한 셈이다. 내친 김에 갈쿠리와 자루를 챙겨 뒷산으로 올라갔다. 어제 임재경씨 모친의 가마솥을 빌려 쓴 값으로 솔가리를 한 부대 긁어 갖다 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올 해는 메주를 아주 수월하게 만들었다. 작년에는 한 말도 안 되는 콩을 삶는데 솥이 작아 이틀이나 꼬박 고생을 했는데 이번에는 큰 가마솥을 빌려 콩을 삶는 바람에 일을 많이 줄일 수 있었다. 아침 일찍 임재경씨네 집으로 내려가 일을 시작해 점심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콩을 다 삶아 들고 올라올 수 있었다. 경험이 없어 콩이 넘치고 밑이 눌어 붙고 애를 먹었는데 된장 한 줌을 풀어 넣으니 신기하게 넘치지도 않았다. 불 조절을 잘하니 별 뒤적일 일도 없었다. 임재경씨 모친이 한 번씩 거들어주는 바람에 너무 쉽게 일이 끝난 것이다. 차에 싣고 올라오는데 내년에도 오라는 노모의 말씀이 고마웠다. 오자마자 곧 콩을 밟아 으깬 뒤에 메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양이 많지 않으니 크게 만들 필요가 없어 손으로 대충 모양을 만들고 한 번씩 뒤집어 주었다. 저녁 아홉시나 되어 일을 마쳤다. 흩어져 있는 것들을 치울 겨를도 없이 그대로 들어가 잤다. 그 전 날 콩을 고른다고 자정이 넘도록 일을 하고 물에 씻어 불려놓은 뒤 이른 아침 눈 뜨자마자 내려갔던 것이다.
사실 오늘은 대학동기의 둘째 딸 결혼식이 있는 날이다. 참석하기로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메주를 미룰 수 없어 마침 서울에 있는 큰 아이를 대신 보내고 직접 가는 것은 생략하고 말았다.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 가기가 어려웠지만 학교 졸업 후 줄곧 모임을 해 온 사이인지라 한편으로는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어차피 앞으로 웬간한 결혼식장에는 가지 않을 생각이고 더군다나 서울의 호텔이라고 하니 더욱 망설여졌던 것도 사실이다.
비탈 진 소나무 숲에 들어가니 솔가리가 많이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다른 낙엽이 많아 솔잎만 모으는 것이 쉽지 않았다. 어렸을 때 우리 집에서는 나무가 궁하지 않아 그다지 솔가리를 즐겨 쓰지 않았던 것 같으나 옛날부터 불쏘시게 감으로는 솔가리만한 것이 없었다. 불이 잘 붙고 불땀도 좋아 아궁이에 불을 붙일 때 안성맞춤인 것이다. 갈퀴를 들고 솔잎을 긁다보니 옛적의 아궁이 불 때던 시절이 생각나기도 하고 스산한 가을산의 바람소리가 그 때의 이런저런 일들을 생각나게 하기도 했다. 나도 불 때는 아궁이 방이 하나 있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도 났다. 시골에서는 꼭 필요한 것이 아궁이인데...
솔가리를 큰 푸대에다 한가득 담아 재경씨네 집에 갔다주었다. 그 집은 인제사 콩을 고르고 있었다. 며칠 뒤에 메주를 쑨다고 했다. 백키로가 넘는 양이라고 한다. 그 집 며느리인 영임씨가 윤 선생님은 우리 어머님하고 잘 사귀어 별 부담 없이 쓰라고 했지만 아무에게나 솥을 빌려주지는 않는다고 했다. 고마운 일이다. 같은 동네에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필요할 때 빌려주고 빌려 쓰는 것, 일손이 바쁘면 도와주고 또 부탁할 수 있는 것. 그러나 본 동네 사람들은 귀농한 사람들에게 별로 마음을 열지 않아 그런 관계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다행히 우리 동네는 귀농한 친구들이 많아 별 어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으니 그나마 큰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재경씨는 나보다 훨씬 먼저 귀농한 사람인데 어머니를 모시고 산다. 그동안 건축 일을 했는데 올해부터는 지원을 받아 하우스를 여러 동 짓고 농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상추와 고추농사를 지었는데 고생은 했지만 쏠쏠한 재미를 본 모양이었다. 영임씨는 채식주의자이면서 모든 농사도 유기농을 고집한다. 그런 덕분인지 상추 같은 경우에 원예농협에서 늘 우선 순위를 보장해 주었다고 한다. 고추는 너무 많이 하는 바람에 판매하는데 애를 먹었고 지금도 끝물이 나오는데 지긋지긋하다고 했다. 얼마 전 한겨레에서 인터뷰도 해 갔다는데 아마 크게 기사가 난 모양이었다.(사진은 한겨레신문에 실린 것임)
그런데 이 부부를 따라와 같이 살고 있는 재경씨 모친은 마치 옛날부터 이 동네에 살았던 사람같다. 나이가 들면 남의 동네에 정을 붙이고 살기가 쉽지 않은데 오다가다 만나면 영락없는 이 동네 사람이다. 잘 모르는 농사일을 물어보면 아주 친절하게 잘 가르켜줄 뿐 아니라 여러번 도움을 받았고 봄에는 호박씨와 오이씨도 얻어 수확을 많이 했다. 이번의 경우도 콩을 실수없이 수월하게 삶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뿐 아니라 어떻게 메주를 쑤는지도 잘 배웠다. 아무리 젊은 사람이 잘한다 해도 노인의 경험이 꼭 필요할 때도 있는 것이다. 노인의 지혜란 묵은 장이나 오래된 술같은 것이다. 겨울들어 군불을 땐다고 솔가리를 긁으로 뒷산 쪽으로 가시는 것을 몇 번 보았기 때문에 한 부대 긁어 갖다 드린 것이다.
어쨌든 메주까지 쑤고 나니 작년보다 조금 늦었지만 가을 마무리가 다 된 것 같다. 이제야 본격적인 겨울작업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해마다 시월 말에 하기로 한 추수감사제를 11월로 미루었는데 다음 주 쯤에는 이웃들을 청해 소주나 한 잔 나누도록 해야겠다. 작년에 김장을 마치고 첫눈이 내렸는데 올해도 김장을 마치자 첫눈이 제법 많이 내렸다. 다만 그 때는 어머니와 함께였는데 지금은 안 계신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물어볼 수가 있었는데 지금은 물어볼 수도 없다. 아직도 살아 계신 것만 같은데 벌써 돌아가신지 반년이 넘었다. 참으로 시간은 잘 간다. 나이가 드니 세월이 유수 같다는 말이 실감난다. 그러나 어쩌랴? 그것이 천리(天理)인 것을.
메주를 매달고. 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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