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바다에서
나이가 사십이면 이미 불혹에 들어섰다. 많은 학자와 시인과 예술가들이 이미 나름대로 각자의 분야에서 자기 완성을 하고도 남은 때다.
그런데 나는 40대에 아직도 감상주의적 어린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이 시기를 지나서야 비로소 유아기를 지난 듯한 느낌이었다.
사람마다 수준이 다르고 성취가 다르니 나로서는 내 생각과 시각으로 바다를 볼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인생을 점검하고 반성하는 훌륭한 시기였으니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것은 한 해 동안 바다와 몸살을 치르고 난뒤 이듬해 다시 쓴 것이니 두번째 기록이다.
1.
쓰린 겨울을 이기고 바다에 다시 봄이 왔다.
칼날 같은 바람으로도 어쩌지 못할 아픈 날들 이였지만
시간은 쌓이고 쌓여 얼었던 물이 풀리고
바다는 새로이 또 한 세기를 시작한다.
죽었던 땅에서 푸른 잎 돋듯 새 생명의 색으로 . . .
2.
커다란 거울.
바다 가까이 오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닌가 보다.
지친 마음을 비춰보곤
넉넉한 품으로
상한 가슴은 다스리게 하고
큰 몸짓으로
때론 침묵으로
바다는 새로이
사람 사랑하는 법을 깨닫게 해 주었다.
3.
아침 출근길에
강동 초입으로 언뜻 보이는 바다의 물색이 너무 좋아
그대로 바닷가 언덕으로 치닫는다.
안녕!
바다는 오늘도 매혹적이다.
해변의 집들과 낮은 산과 철석이던 파도는
빠뜨리지 않고 나에게도 반가운 아침 인사를 한다.
오늘은 어떤 빛으로 유혹의 손길을 던질른지,
어떤 경이를 보여 줄른지 . . .
4.
찬 봄비 끝으로 난데없는 싸락눈이 떨어지던 날의 정자 고개를 넘어
강동 바다는 오늘 참 험합니다.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아내의 목소리도 바람에 떨리었습니다.
찻집 창문 너머로 내다보이는 파도는 흰 포말의 발톱을 세운 뒤
산더미로 백사장을 뒤덮어 내리고
해안 도로를 자동차 한 대가 질주하여 지나갑니다.
내 마음속으로도 웬 찬바람 한 가닥
쏜살같이 지나가는 듯 하였습니다.
5.
파도가 거친 바다는 오늘도 참 좋습니다.
무엇하나 거칠 것 없이 너른 세계는 마음까지 탁 트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속에서도 많은 생각과 인연의 엇갈림과
또는 사느라 힘든 세상의 온갖 사연들을 안으로 품어 감추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지나간 아픔, 속 쓰림과 상처를 겉으로 다 드러내 놓고 살수는 없는 것이겠지요.
물길에 깎여 밖으로 드러난 암벽 위에 해찬 소나무 한 그루 의연합니다.
6.
어제 어느 아는 음식점 주인이
‘이제 쑥이 다 커 버려 못 먹어요’ 하는 말을 듣고
어느 사이에 벌써? 하고 놀랬습니다.
아직도 꽃샘추위가 기승이고 저녁 무렵엔 눈까지 내렸다는데
봄은 이미 우리 곁에 그렇게나 바짝 다가와 있었다니요.
하긴 4월이 다 돼 가는데도,
골짜기마다 연한 새움 벌써 터 올라왔는데도
아직도 봄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내 마음이
어딘가 잘못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렇게 바쁘게만 살다 보면 봄은 또 후딱 지나가 버리게 되고
올 봄도 결국
아쉬움만 덩그러니 남게 되지나 않을는지. . .
7.
손에 잡힐 듯 눈에 아른거리는 봄 바다.
완연한 봄.
정자 고갯길 산비탈로
선홍색 꽃잎 피고, 연한 새잎 나뭇가지마다 점점이 묻어나는 모습은
바다에 이르기까지 지워지지 않습니다.
황량했던 시간은 가고 새로 맞는 날의 신선함이
이렇게 가슴 뛰도록 즐거움 일수도 있다는 것.
오늘 바다는 빛나는 초록입니다.
8.
봄은 우리 곁에 어디든 따뜻함으로 와 있는데
요즘 사람들은 기를 쓰고 밖으로만 봄을 찾으러 다닙니다.
마치 봄꽃 놀이에 빠지면 억울하다는 듯이 말입니다.
논둑 한 켠에 다소곳한 민들레꽃이나
이름 없는 나무가 주는 봄의 신선함에 눈 돌리지 못하고
화려한 꽃 잔치만을 무리 지어 좇아 다닙니다.
어느 곳인들 봄이 예쁘지 않은 곳이 있겠습니까만
요즈음 정자 고개 산비탈을 넘어가다 보면 ‘고향의 봄’이라는 노래가
저절로 생각이 납니다.
부드럽게 살 오른 골짜기를 타고 군데군데 무더기로 피어난 산 벚꽃들의 화려함이
신춘의 나무들이 내뿜는 푸른빛과 어울려 그야말로 눈부십니다.
더군다나 저 아래쪽의 따뜻한 봄 바다 색깔은 또 얼마나 평온한지
나도 모르게 노랫말을 흥얼거리다 보면
이곳 어디쯤에 눌러앉아 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오늘 같은 날은 사랑하는 이와 같이
봄이 흐르는 시냇가에 발을 담그고 앉아 유유자적 해보는 것도 즐거울 것입니다.
모든 것을 훌훌 벗어버릴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9.
혼자서 점심을 먹고 있는 나를 보고
누군가 고독한 방랑자의 모습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혼자 있고 싶은 마음,
그 은밀한 기쁨을 맛보고 있는 것일 뿐. . .
비록 나는 관망자에 지나지 않지만
바다는 온전히 바다를 알기 위해 다가온 사람만을 반겨 할 것입니다.
그 절대의 경이에 머리 숙여 교만하지 않은 사람에게만
바다는 마음을 열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바다는 고독이 아니라
사랑을 가르쳐 주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10.
봄 감기를 앓던 날 나가 본 바다는
흐린 하늘 아래 잔뜩 비에 젖어 있었습니다.
바다도 몸살을 앓는 듯
멀리서 수없이 일어났다 스러지는 흰 파도가
가슴에 이는 무슨 생채기 인 듯 하였습니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마음에 많은 상처를 받아 가며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잘 다스려
바람이 지나면 다시 깨끗해지고 반듯해지는 바다처럼
항상 마음의 평정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11.
오랜만에 비가 촉촉이 내립니다.
산허리를 타고 비안개가 천천히 묻어 내려옵니다.
이제 산 전체로 무성해진 신록은 빗속에 한층 더 선명한 푸르름 입니다.
아무 거리낌도 없이 온 하늘에서 지천으로 내리는 비
그 흡족한 빗줄기 속으로 산은 한 폭의 수묵화 같고 안개는 흐르는 물입니다.
고운 비. 그대로 고마운 비입니다.
정신없이 분주하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주는
오랜만에 단비가 오는 날 입니다.
12.
5월의 바다는 아직 한적합니다.
그 안온한 바다 가까이 서면 물밑으로부터 들려오는 듯
바다의 찬 숨소리가 느껴집니다.
오늘도 나는 물가에 서서 깊은 바다의 소리를 듣습니다.
어두운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점점이 울려 나오는 . . .
13.
늦은 아침 빛나는 바다.
방파제에 부딪혀
철벅이는 물소리가 평화로운 날.
머리를 감고 햇빛에 말리려 나온
물 내음 가득한 동네 여자의 부드러운 몸매가 매혹적이다.
14.
찔레꽃.
달콤하고 애틋한 냄새를 기억하나요?
잊으셨나요?
이름 없는 산골짜기 기슭에 하얀 무더기로 피어
가슴 설레이게
잊었던 날들을 떠오르게 하는 그 순한 향기.
15.
물길 사나운 바다처럼
깊고 넓게
그렇게 살기는 해야겠지만
지어 놓은 것 없다고 부끄러워 할 이유는 없다.
기슭으로 와 부딪는 파도의 습성을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지 않는가?
끝없이 살아 있는 팽팽함으로 부딪혀 오지만
멀리서 보면 그것은
단지 하나의 움직임 없는 풍경뿐이라는 걸.
16.
신임 육성 회장 주 사장이 지난겨울
우리나라에서 제일 멋진 건물을 짓겠다고 목에 힘주면서 말했던
그 자리에 드디어 통나무집이 하나 들어서기 시작했다.
바닷가 가까운 곳, 백사장 쪽으로 바짝 붙여 또 한개
거대한 구조물이 들어선다.
완성된 건물, 화려한 실내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면 참 멋질 것이다.
고급스런 인테리어와 값비싼 차와 음식 속에서
도시의 연인들은 또 얼마나 우아한 시간을 가지게 될 것인가?
그러나 나는 왠지 마음이 무거워 진다.
가슴속에 무언지 노여움 같은 것이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이 우라질 것들!
17.
오늘은 부끄러운 날.
꽃을 달아주며
스승의 노래를 소리 높여 부르는
아이들의 눈을 바로 보기 민망하다.
저 철모르는 아이들에게
나는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심어 주었던가?
더욱 부끄러운 것은
저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고 꽃을 달아주면서도
가슴으론 진정 그 이유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최소한의 지녀야할 아름다움은 잊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는
저 아이들의 당당한 무책임은 누구의 죄이냐?
생각할수록 마음이 무거워 지며
가슴의 꽃이 떳떳하지 못한
아. 오늘은 부끄러운 날.
18.
햇볕 좋은 날 아침 바닷가에 한 번 나가 보세요.
방파제에 부딪혀 철벅이는 물소리를 가만히 들어보세요.
물결 위에 부서지는 밝은 햇빛 아래로 깨끗하게 드러난
신선한 물 냄새 가득한 맑은 바다는 우리들 마음입니다.
산에 한 번 올라가 보세요.
그리고 둘러보세요.
산은 한 가지로 푸른 색 이지만 수많은 이름 없는 풀, 나무가 모여
그렇게 고운 산색을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자연으로 나고 지지만 그것이 곧 생명이며 다른 생명의 터전이 되는
서로 도우며 어울려 살아가는 곧 우리들 다정한 모습입니다.
오늘 저녁에는 어머니 아버지 얼굴을 한 번 가만히 들여다보세요.
손이라도 꼭 잡아 보세요.
그 얼굴을 사랑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분들 보다 더 행복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얼굴은 바로 먼 나중의 우리들 모습입니다.
그리고 밖에 나와 하늘을 한 번 쳐다보세요.
제각각 빛을 반짝이며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무수히 많은 별들.
그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항상 따뜻한 빛을 잃지 않는
별들의 신비를 느껴 보세요.
그리고 가슴마다 한 개씩 별을 담아 보세요.
반짝이는 별은 우리의 꿈이며 희망입니다.
19.
바다가 완전히 제 모습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6월의 어느 날
푸른빛을 잃고 온통 죽어 있는 하얗게 뜬 바다.
왜 거기에 바다가 있었는지 느닷없이 의아한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가까이 지내던 사람이 어느 날 문득
낯선 사람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간혹 그렇게 잘 알고 있는 듯 지냈던 것들이
때에 따라서는 갑자기 알 수 없는 모습을 드러내며
당혹스럽고 생경해지는 경우도 있는가 봅니다.
20.
한바탕 소나기가 퍼부은 뒤 햇볕 쨍한 점심시간
담 옆으로 난 수돗가 주변에 난데없는
산 까치들이 모여 와 뛰고 날며 꽤나 시끄러웠습니다.
그렇게 많은 까치를 일찍이 가까이서 본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좋은 소식이 한꺼번에 쏟아지려나 봅니다.
참 상쾌하고 신나는 광경 이였습니다.
나뭇가지 위로 날아오르며 소리 지르고
땅바닥으로 내려앉거나 다른 녀석을 뒤쫓으며
깡총깡총 캭캭 소리 지르는 평화로운 풍경이
문득,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것이 결코 흔치 않는 것이 되 버렸기 때문입니다.
21.
반가운 사람인양 느닷없이 달겨드는 아이를
어쩔 수 없이 함께 껴안아 주었다
가슴에서는 나도 모르게 뜨거운 것이 솟아 올라왔다
우리도 이렇게 누구든 얼싸안고 서로 사랑을 나누며 살아갈 수는 없을까
미운 사람도 없이 싫은 사람도 없이
태연학교*에 와서 생각한다.
우리 못난 사람들일수록 더 큰사랑이 필요한 것이라고.
*울산 북구 대안에 있는 정신지체아 대상 특수학교
22.
삼수*는 물고기를 안 먹는다
가시가 있기 때문에
상태*는 사람만 보면 웃는다
자기가 웃으면 남도 따라 웃기 때문에
잔치가 끝나고 사람들 모두 떠난 뒤
삼수와 상태가 촛불 옆에서 놀고 있다
둘이서만 놀고 있다.
나도 옆자리에 끼였다.
내가 같이 놀 자격이 있을까?
*모두 정신지체아 이다.
23.
바다는 푸른빛을 쏟아내고.
무심한 하늘에 흰 낮달 하나 걸리어
그 왼 아무 움직임도 없는
물가로 섬 하나 우두커니 섰다.
물빛에 쌓인 채
모든 인연이란 전날의 구업인가?
木魚의 전설을 생각하고
젖은 가슴 떨리나니.
그건 구름 이였어.
바람 날아오르고 빗방울 튀던
소나기 뿌린 뒤 지나간
한낮의 구름 이였어.
그래,
그건 물위에 비치던 한 가닥 구름 이였어.
연꽃 한 닢 같은 구름 이였어.
새잎 돋아 무성한 후
뜻 없이 저버린 시간만큼도 안 되는
꽃잎 같은 구름 이였어.
24.
고개를 넘었다. 바다가 보이는
그리고는 ―
빠질 듯 스며드는 시간 이였다.
깊은 속내 들어앉았던 아픔
부끄러움까지도
속속들이 드러내고 삭이고 다스리는. . .
말없음이여.
끝도 시작도 없음이여
바다는 떨어져 앉은 하늘이었다.
바다를 보며
다시 바다를 보며
남은 날이 더 새로워지고
툭툭 비늘을 털 듯 무거움을 덜고
나는 한 고비를 넘었다.
- 나는 내 인생의 큰 고개 하나를 넘어섰다. 인연이란 사람에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그것은 나 자신의 생각과 상황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로 인한 문제는 스스로 짊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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