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유용하게 보내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미처 지리산의 거처가 완공되지 않았다는 것을 핑게로 아파트에서 하는일 없이 시간을 죽이고 있는데 못할 일이다. 갈수록 게을러지고 움직이는 것이 싫어진다. 아마 몸이 움직이기 싫어하는 것 같아 그대로 방치하고 있지만 이렇게 오래가서는 안될 일이다. 어서 그쪽으로 가고 싶다.
시간을 보낼겸 진즉부터 전각이나 서각을 한번 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는데 염두를 못내고 있다가 이제서야 한번 손을 대 보았다. 서각도 일정한 학습과 연마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우선 내가 그동안 눈여겨 보아왔던 작품의 모양새나 형태를 염두에 두고 혼자서 시작을 하였다. 그야말로 생짜로 시작을 한 셈이다. 인터넷으로 서각공구를 주문하고 목재상에 가서 정식 서각용은 아니지만 적당한 판자를 구입해 잘라서 사용하였다. 서각용으로 쓰는 것은 특수목이라 하여 느티나무, 향나무, 은행나무, 참죽나무 등 여러가지가 있는데 값이 꽤 만만치 않고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일단 시작하고 보니 어느정도 눈썰미와 손재주가 있어 그만그만하게 글씨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우선은 가장 기본적인 음각으로 시작했다. 기본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강건하고 또렸한 모양이 가장 마음에 드는 형태이기도 하다.
집을 짓기 시작하면서부터 당호를 서각으로 파서 걸어야겠다고 벼르다가 이제서야 손을 댄 것이기도 하다. '松下山房', 먹을 갈아 며칠동안 습작한 결과 어느정도의 글씨가 나오자 판지 위에 붙이고 글을 파기 시작했다. 글씨 쓰는 것 보다 훨씬 재미가 있다. 하루종일 씨름하여 글을 완성했는데 그만그만하게 봐 줄만 하였다. 그러나 낙관을 파다보니 생각보다 쉽지않아 모양을 그르치고 말았다. 그러나 내심 흡족하였다. 첫 작업치고는 성공적이었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거실에 걸 유우석의 누실명으로 위의 사진에 나오는 것이다. 작은 글이라 조심스럽게 작업을 하였는데 별 탈없이 팔십여자의 글을 완성하였다. 처음보다는 조금 더 잘 만들어졌고 만족스러웠다. 그 다음 작업이 산청의 김선생이 집을 수리해 들어가면 선물할 생각으로 판 주련 형태의 글씨다. 이것은 누실명의 첫구를 따서 크게 판 것으로 유우석이 공자의 말을 인용해 이야기한 크고 화려한 집이 좋은 집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이 훌륭해야 좋은 집이라는 뜻이다.
내친김에 같은 학교에서 근무했던 서지원 선생에게 줄 소품도 하나 만들어 보았다. 퀼트공예를 좋아해 열심이더니 작년에 개인 작업실을 열었는데 아마 상업적인 것은 아닌듯하다. 그래도 사람들이 드나들 것이니 기념으로 가게안에 걸어둘만한 간단한 소품을 만들어 본 것이다. 이것은 좀 더 발전하여 먹물을 입혔다. 그런데 산뜻해 보이기는 하나 위에 보이는 맨 얼굴의 작품이 더 정감이 가는 것은 왜인지 모르겠다. 먹물은 나무에 배는 단점이 있어 아크릴 물감을 많이 사용하는데 우선 처음이라 먹과 인주를 그대로 이용해 보았다. 마무리를 해놓고 보니 나름대로 괜찮은 모양이 되었다. 약속한대로 후배나 지인들에게도 작품을 만들어 선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공일이라는 것이 소일거리로는 아주 훌륭하다. 서각도 그렇지만 목재를 이용해 간단한 실내용구나 물건등을 작품성을 가미해 만들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다소 엉뚱하거나 또는 고상한 형태로... 어쨌든 나무를 이용해 무엇을 만들어 보는 것이 나로서는 체질에도 맞고 소질도 있어보인다. 전생에 나는 목수였을까? 유난히 나무를 좋아한다. 또 무엇을 구상하고 기획하는 일을 꽤나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직업으로서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이 방송국의 프로듀서였다. 어떤 내용을 기획하고 그것을 구체화 시켜서 지적이고 문화적인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 낸다는 것이 얼마나 뿌뜻하고 흥미로운 일이겠는가? 그래서 지금도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좋아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했다. 인생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니까. 그렇다고 나의 직업이었던 교사로서의 인생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도 나름대로의 의미와 훌륭한 역할을 해낼 수 있었으니...
한 때 김철수 화백의 나무 판화가 참 마음에 들었다. 작품과 글의 내용도 그렇거니와 연배나 생각이 비슷해 더 정감이 갔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때가 되면 목판화나 나무 조각을 한번 해보야지 하고 생각을 했었다. 돌에 새기는 전각도 해봄직 하지만 내 성향이 단단한 돌보다는 질감이 부드러운 나무를 훨씬 좋아하고 친근감을 더 느끼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좋은 글을 써보고 그 뜻을 아는 것도 좋지만 나무에 옮겨 칼로 새겨보는 것도 또한 재미있고 즐거운 일인듯 싶다. 며칠동안의 작업을 통해 다시 느끼는 것은 무슨일이든 흥미를 내어 시작하면 잘하든 못하든 스스로 즐겁고 자기만족을 이룰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사실은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산내에 정착하면 이층 방은 작업실 겸 서재를 쓸 예정이니 본격적으로 글씨와 서각을 해 보아야 겠다는 생각도 든다. 해야 할 목표가 또 하나 늘었다.
2011. 새해에 송하산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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