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과 함께

지리산을 보며

지리산의 아침

방산하송 2011. 5. 24. 15:40

 

아침의 햇살은 늘 새롭다. 어제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침에 해가 일찍 뜨면서 눈 뜨는 시간도 빨라졌는데, 오늘 아침에는 눈을 뜨니 어제 내린 비 때문인지 앞산이 온통 안개로 꽉 찼다. 햇살이 비치면서 안개 낀 골짜기가 신비로운 기운마저 돈다. 밖으로 나가보니 이슬을 잔뜩 머금은 풀들이 싱싱한 아침을 맞고 있다.

 

도시의 새벽은 늘 둔중한 굉음으로 나를 압박하였다. 그 소리를 들으며 언젠가는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다짐을 하곤 했다. 아니 어떤 경우엔 그 아침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서둘러 출근을 재촉하기도 했다. 부산한 마음으로 늦을 새라 가슴을 조이며... 그렇게 매일 매어 사는 것이 대부분의 일상이어서 사람들은 아예 자연의 아침을 잊어버리고 산다. 아침을 맞이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연의 일부로서의 삶을 포기하는 일이다. 새벽의 숨소리, 안개의 손짓, 막 올라서는 햇빛의 인사를 마주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연과의 단절이며, 그것은 자연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부정하는 일인 것이다.

 

 

운이를 데리고 집 뒤쪽으로 올라갔다. 집 앞의 소나무도 이제서야 지지개를 켜고 있는 듯 하다. 먼저 막 모내기를 마친 논들이 아침잠을 깨고 있다. 여기는 지대가 높아 다른 지역보다 모를 일찍 낸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늦게서야 겨우 모를 낸 나도 논으로 가 보았다. 아직은 연약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모두 뿌리를 내리고 실하게 자라날 것이다. 잘 자라 달라고 초보의 아침인사를 하였다.

 

길가의 고사리가 어린 손들을 내밀고 있고 이름 모를 풀들도 아침 햇살에 눈 부시다. 개망초 칡넝쿨마저도 아름답다. 황대권이 잡초라는 말은 인간의 오만함이라고 하였다. 사람의 입장에서 구분한 말일뿐 식물마다 자기 역할이 있고 특성이 있을진대 무엇무엇을 따로 가릴 수 있다는 것인가?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골짜기의 숲과 나무는 아직 잠에서 덜 깬 미인의 모습이다. 햇빛이 스며들면서 희부옇게 밝아오는 모습이 매혹적이다. 안개가 많아서인지 풀잎마다 이슬이 지천으로 달렸다.

 

오래 전 읽었던 쥘 르나르의 산문집 '자연의 이야기들'의 첫 구절인 '영상의 사냥꾼'이 생각난다. 아침에 일어나면 사냥을 가는데 총은 필요 없고 눈만 가지고 간다는 것이다. 먼저 시냇물을 눈으로 맞춰 잡고, 다음엔 길가의 풀을 잡고, 나무를 잡고, 안개를 잡는다는 식의 내용이었던 같다. 그의 문학적 재치가 부러웠는데 나도 오늘 아침에는 감히 그의 흉내를 내어본다.

 

 

산 비탈에는 요즘 한창인 찔레꽃들이 무더기로 피어있다. 아카시아도 제 철이다. 그 향기가 코 끝을 간지르는듯 아릿하다. 특히 찔레꽃의 향기는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 순박하면서도 사랑스러운, 꼭집어 이야기 할 수 없는 그리움이나 향수 같은 것... 

 

봄꽃들은 풀꽃이 많지만 여름꽃은 대개 나무에 열리는 꽃들이 많다. 봄이 아랫쪽에서 시작해 산을 타고 올라가듯 꽃도 산위로 올라가는 것이다. 나무마다 꽃들이 주렁주렁 달렸다.

 

 

흔히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사소한 것에 연연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인정에 쏠리거나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냉철한 판단을 해야 한다고도 한다. 그런데 만약 작은 일을 무시하는 인간적으로 메마른 사람이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하거나 피해를 주면서 얻은 성취라면, 그것이 과연 얼마나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꽃을 사랑하는 마음, 아침 안개나 저녁 노을을 보고 감탄할 수 있으며, 밤하늘의 별을 보며 신비로워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정치를 하고 기업을 운영 한다면 우리 사회가 훨씬 더 살맛 나게 되지 않을까?

 

 

감자밭에도 고추밭에도 아침이 왔다. 무논의 어린 모들은 아침 햇살 속에서 가녀리게 숨을 내 쉬고 있다. 어느 고랑, 어떤 싹도 농부들의 손이 안 닿은 것은 없다. 모종 한 포기가 그렇게 귀한 것인 줄 몰랐다. 씨를 뿌린 후 어린 싹이 올라오는 것이 그렇게 대견할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 그렇게 심고 옮긴 후 농부의 땀으로, 햇빛과 바람과 비의 도움으로 키워내는 것이다. 모가 주인의 발자국 소리 듣고 큰다는 말이 있듯이 농부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논과 밭을 둘러보고 손을 본다. 그 정성을 다른 무엇에 견주리! 천하의 가장 큰 일은 농사라고 하였고 두번째는 사람을 키우는 일이라고 하였다.

 

 

안개가 서서히 걷히면서 멀리 천왕봉이 모습을 보인다. 말 없이 지켜보는 산이 있어 더욱 좋다. 푸른산에 깃들어 사는 짐승이나 새처럼 사람도 거기에 기대어 사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동네의 부지런한 농부들은 벌써 일어났을 것이다. 다락논과 비탈의 나무들도 지금은 다 일어섰다. 나도 이제 오늘 사로잡은 사냥감들을 제자리에 돌려주고 다시 돌아가야 겠다.

 

 

내려오는 길에 건너다 본 삼정산과 소나무는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다. 표표히 걸린 안개는 오늘은 날이 좋을 것이라는 표시다. 

 

아침을 맞는다는 것은 또 다시 새로운 하루를 맞는다는 것이다. 늘 다시 시작하지만 그 때마다 새롭고 신선하다. 그리고 이렇게 아침을 마주하며 살 수 있게 된 것이 고맙고 감사하다. 오늘도 땀 흘리는 하루, 서로 사랑하는 하루,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하루, 그리하여 힘들지만 감사하고 아름다운 하루가 되기를 기대한다.

 

 

신묘, 어느 늦은 봄날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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