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과 함께

지리산을 보며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방산하송 2011. 5. 16. 13:27

개는 스스로 개가 되었는가? 사람이 만들었는가? 정우규 선생이 이야기 끝에 농담삼아 한 말이다. 자기 생각으로는 사람이 훈련을 시키고 키웠다기 보다 개 스스로 먹이 확보와 안전을 담보로 사람 곁에서 생활하는 방법을 취했다고 보는것이 옳다고 했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자신을 지키고 자기 존재를 드러내기 위한  본능적인 행위는 같은가 보다. 동물은 힘과 행위로서만 그것을 나타내지만 인간은 의도적이고 계산된 방법을 통한 다양한 수단으로 드러낸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근본적으로 사람이나 동물이나 이런 행위 바탕에 숨어있는 심리적 기제는 자기 영역의 확보를 위한 원초적 욕망과 불안 때문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남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드러내고자 하는 욕심, 무시당하지고 싶지 않은 방어적 심리를 무의식적으로 표출한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보호본능적 행위인 것이다. 그런데 과도하게 이런 점을 노출시키는 소아적인 행동을 보이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한 행동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 비우호적인 행위는 인간이 가지는 약점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흔히 공격적인 행위나 무시, 무조건적인 반발과 같은 행위는 1차적으로는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는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서로의 관계를 해치는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할 뿐이다. 청소년기의 특징인 이유없는 일탈과 충동적 행위도 아직 성숙하지 못한 자아에 대한 불안함의 발로인 것이다. 모든 인간관계간의 문제를 보면 이러한 심리적 허약함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부모자식간에도, 형제간, 부부간에도, 친구간에도, 직장의 상하 동료 직원과의 사이에도  작용한다. 흔히 가까운 사람사이에서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줄다리기는 기실 자기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위장된 몸짓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라는 제목이 갑자기 생각난 것은 최근 시간이 많아지면서 가까운 사람들과의 사이에 나타나는 이러한 심리적 방어기제에 대한 것을 발견하고 느끼면서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된 까닭이다. 어머니의 말씀 중에, 아내의 행동에서, 친구나 동네 사람들의 태도, 가게나 식당 주인의 응대에서, 지나쳐가는 사람들의 행동과 말 중에서도 종종 이런 것을 느끼고 실망하기도 한다. 과시하고자 하는 행위, 의견에 호응하지 않고 무시하는 태도, 혼자 다 잘 안다는 식의 말투, 가르치려고 드는 버릇, 어떤 일의 문제점만을 강조하거나 끊임없는 변명, 경망스러움 등, 당당한 자신감을 같되 겸양과 관대함을 지닌 진중한 행동을 보여주지 못하고 이런 미성숙한 반응과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대단히 불행한 일이다. 동시에 나 자신도 이런 점으로 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런 행위의 가장 일상적인 현상이 교만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겉으로 들어나는 교만도 내면의 바탕은 욕망과 불안감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기 절제와 자존감을 가진 주체적 삶의 태도가 아니라 이기적 생각과 자기 존재의 과시를 위한 미숙한 행동의 표현일 뿐이다. 그런 욕망과 이기는 결국 다른 사람의 영역을 침범할 수 밖에 없고 누군가는 상처받고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는 일이다. 특히 자본과 권력을 가진 자가 교만에 빠지면 이는 사회적으로 크나큰 피해를 가져올 수가 있다. 부는 결코 스스로의 행위로서만 이루어질 수 없고 누군가의 희생이 밑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권력도 스스로 행사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있고 복종하는 자가 있을  때 행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성인들이 가장 경계해야할 사람의 심성을 교만이라고 한 것도 그것이 가지는 파괴성과 해로움을 이미 잘 간파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한 교만을 가장 경계한 분이 예수다. 예수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느님과 교회에 대한 봉사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사랑과 봉사, 힘없는 자들에 대한 봉사와 사랑이다. 이미 사람은 예수를 통해 모든 죄와 부족함을 용서 받았다. 예수를 믿는다면 자기의 부족함을 부끄러워 할 필요도 없고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몸부림 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향해 무엇을 이루어 주기를 요구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한 용기와 힘을 기도해야 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예수가 우리에게 해준 것처럼 봉사와 사랑으로 아름답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데 앞장서서 힘써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허약하다. 그러나 많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이성을 갖춘 존재이므로 이러한 과정을 적절히 제어하고 다른 사람과 협력함으로써 더 나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이 상식이 있고 건전한 인간의 보편적 행동이다. 그런 사람이 많을수록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변과 남을 의식하고 탓하기 전에 늘 자기 자신부터 뒤돌아 보아야 한다. 또한 자기의 모자람을 솔직히 인정하고 잘못은 즉시 고치는 태도도 중요하다. 그것이 인간관계를 지속하는데 중요한 덕목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사람들은 종종 부정하려 든다. 자기의 약점을 숨기고 모자람을 감추고 싶은 것은 본능적인 것이겠지만 남을 공격하고 무시함으로써 그것을 가리려 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기만일 뿐 아니라 남에게도 큰 상처를 준다는 것을 잘 기억해야 한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애쓸 것이 아니라 보여지는 것을 스스로 갖추고 가꾸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산은 수많은 나무와 풀과 꽃들의 집합체이다. 생물학적으로는 식물도 보이지 않는 치열한 생존경쟁을 하며 장기적으로는 종의 분포가 달라진다고 하지만 겉으로 나타나는 형태에 있어서는 크게 공간적 자리다툼을 벌이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크고 작은 나무, 보잘 것 없는 풀, 그리고 깃들어 있는 많은 새와 짐승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또한 그 속에서 각자의 역할이 있고 서로의 빈 틈을 메워주며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한 다양성이 건강한 숲을 형성하고 아름다운 산을 만드는 것이다. 한 가지 종류의 나무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산이 어찌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사람사는 세상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형태의 사회가 있고 다양한 특성의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특성이나 다른 의견도 존중하며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자세를 가지지 않으면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 내기가 어렵다. 따라서 아름다운 세상은 각자가 먼저 자기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성찰하는 가운데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런 글을 쓰고 있는 내가 교만스러움을 떨고 있다는 생각도 들지만...

 

신묘 늦봄.   송하산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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