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저기 심어 놓은 호박들이 여름이 되니 무성하게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시들시들하던 것들인데 장마를 지나고 햇빛이 뜨거워지자 하루가 다르게 번창하고 있다. 호박 구덩이를 미처 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퇴비와 거름을 넣자마자 흙을 덮고 그 위에 그대로 모종을 옮겼는데 시기도 늦고 아무래도 무리인지 처음에는 제대로 자라지를 못했는데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온 담벼락을 덮어 간다. 아래쪽으로 내려오는 줄기를 몇 가닥 위로 자리를 옮겼더니 큰 잎들이 뒤집어지거나 줄기가 꺾였다. 그냥 버리기는 아까워 그 잎들을 가지고 들어왔다. 호박잎쌈을 먹은 기억이 나 삶아 보기로 한 것이다.
집사람에게 물어 냄비 안에 받침대를 놓고 호박잎을 삶고 젖국도 만들어 저녁 반찬으로 놓았다. 거칠면서도 부드러운 호박잎은 담백하고 된장이나 젖국과 잘 어울려 쌈으로 먹기가 아주 편하고 좋았다. 다른 반찬은 미처 돌볼 틈도 없이 저녁을 호박잎으로 다 먹었다. 오랜만에 잘 먹었다는 소리가 나왔다. 이제 막 익기 시작하여 따온 토마토 서너 개로 입가심까지 하였다.
호박을 심을 때 어떤 것이 필요한지 잘 몰라 일반호박, 마디호박, 단호박, 조롱호박 등 종류별로 여러 가지를 심었는데 모종을 구입한 곳이 모두 다르다. 마디호박은 어머니가, 단호박은 인월장에서, 일반호박은 함양시장에서, 조롱호박은 생초의 김 선생에게서 얻은 것이다. 호박은 못생긴 것의 대표적 비유로 쓰이지만 그러나 내가 보건데 호박의 꽃이나 모양새가 결코 못생겼다고 볼 수 없다.
호박은 여러 가지 음식으로 만들어 먹을 수 있는데 호박죽, 호박떡, 호박전, 호박무침 등이 있고 일상적으로 애호박은 된장을 끊이는 좋은 재료이기도 하다. 여러 가지 식재료로 쓰일 뿐 아니라 다양한 효능을 자랑하기도 한다. 호박은 당질이 많아 소화흡수가 잘 되며 이뇨작용을 촉진시키고 콩팥기능을 향상시켜주어 꾸준히 복용하면 부기제거에 탁월하다고 한다. 또한 풍부한 카로틴을 가지고 있어 인체의 면역력을 향상시켜주고 질병예방에 도움이 되며 항암효과도 뛰어나다고 한다. 비타민A가 풍부하여 야맹증이나 눈의 피로회복에도 좋고 혈액순환도 도와주며, 몸을 따뜻하게 하여 위를 강화시켜주고 피부미용에도 좋다고 한다. 이래도 호박을 무시할 텐가?
알고보니 호박의 원산지는 중남미이다.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라 하고 처음에는 잘 먹지 않다가 조선말기에 와서야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 어쩌면 호박이나 고추같은 것들은 우리 고유의 채소같은 느낌이 드는데 모두 늦게서야 전래되어 들어왔다는 것은 좀 놀랍다. 그런데도 어떻게 가장 기본적인 식품으로 자리잡게 되었는지 우리의 입맛이 좀 유별난 모양이다.
호박뿐 아니라 여름은 모든 채소들이 한창 자라는 시기여서 먹거리가 풍성하다. 상치나 열무같은 것은 물론 가지와 오이, 들깻잎이나 고구마 줄기도 훌륭한 밑반찬 거리가 되고 고춧잎도 삶아 무치면 맛있는 나물 반찬이 된다. 저녁을 먹으면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겨울에는 어떻게 반찬거리를 준비해야 하나 걱정이 되었다. 채소나 과일이 없으니 갈무리를 해야 할 수밖에 없는데 그럴만한 것이 있겠는가? 궁리를 해 보았다. 우선 무우 배추로 김장을 해야 할 것이고, 국거리로 시래기를 많이 말려놔야 할 것 같다. 과일은 생각나는 것이 감인데 적당한 양을 구해 홍시로 만들어 먹을 수 있도록 독안에 저장을 하고, 사과는 바로 윗동네 원천리의 사과농장에서 한 박스씩 사다 먹으면 될 것 같다. 밀감도 좋은 과일이고 유자도 구입해 차를 만들어 먹으면 좋을 것이다. 고구마는 겨울까지 저장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비닐하우스를 짓고 겨울 채소를 구해 그 안에다 심으면 싱싱한 채소도 맛 볼 수 있을 것이다.
무더운 저녁 이마에 땀을 흘리며 저녁을 잘 먹고 밖에 나 앉으니 이보다 더 좋은 피서가 없다. 거의 집 밖으로는 나가지 않고 불볕더위를 잘 보내고 있다. 후덥지근하면 밖에 나가 풀을 뽑거나 밭일을 하며 땀을 흘리고 들어와 찬 물로 샤워를 하고나면 그렇게 개운하고 기분이 상쾌할 수가 없다. 오늘 낮에 운이의 사료를 사러 밖으로 나갔는데 길가에 차들이 줄을 이어 다녔다. 지리산 피서객들이다. 그동안 몰랐더니 뱀사골이나 백무동 쪽에는 사람이 득실거리는 모양이다. 한적하던 실상사에도 오랜만에 매표소가 문을 열었다. 평소에는 매표소 운영도 안하던 곳이다. 휴가 보낸다고 모두 고생이다. 나름대로 재미가 있기는 하겠지만 속으로 생각해보니 무더운데 돌아다닌다고 얼마나 힘들겠는가 한편으로 안쓰런 마음도 들었다.
나는 우리 집에 가만히 앉아서 매일 피서를 하고 있다. 뒤로는 푸른 나무들, 앞으로는 우뚝 선 지리산, 때때로 부는 바람, 그리고 한적함, 한가함이야말로 여름을 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이 든다. 얼마나 나가지 않고 집에만 있었던지 자동차 시동이 시원찮아 수리 점에 갔는데 장마철에 너무 오래 세워두어 자연 방전으로 밧데리가 약해졌다는 것이었다. 하긴 뻔질나게 드나드는 사람도 있지만 시골에 살면서 자동차로 다닐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여름 내내 인월이나 생초에 모두 서너 번 나간 것과 기껏 1 km 남짓한 면소재지에 다녀 오는 것 말고는 어디 간데가 없는 것 같다.
엊그제는 어느 지인이 다녀가겠다고 하더니 취소하고 말았다. 휴가철 교통난에다 지리산 피서 인파에 지레 겁을 낸 모양이다. 여기는 그것과 별 상관도 없지만 나는 내심 얼마나 다행으로 생각했는지 모른다. 일일이 대접할 수도 없고 일에 방해만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만약 왔으면 맛있는 호박된장국이나 호박잎쌈을 대접했을 것이다. 지리산 시인 이원규가 쓴 시에 보면 힘들고 어려울 땐 지리산으로 와 보라고 실컷 부추기고 난 뒤에 가장 마지막 연에는 '그러나 어지간하면 오지 마세요' 라고 맺음을 했는데 난 그 역설에 웃음을 참지 못했으면서도 공감을 하였던 바다. 도시를 혐오했기 때문에 도시 냄새를 풍기는 사람들도 별로 반갑지 않다. 가끔 위 쪽 길섶 갤러리에 사람들이 떼로 오가는데 쳐다보는 내 눈길이 별로 곱지 않다는 걸 느꼈으리라.
학교 다닐 때 배운 교과서에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며'라는 글이 있었는데 가을 나뭇잎을 태우면서 일상을 관조하는 뛰어난 수필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나는 기껏 호박잎을 삶아 먹는 일과 여름나는 얘기로 글을 쓰고 있으니 조금은 민망하기도 하다. 그러나 백거이가 消暑(소서-더위 삭이기) 라는 글에서 熱散由心靜 凉生爲室空 (열산유심정 량생위실공) '마음 고요하니 열기 흩어지고 방안이 텅 비니 서늘함이 감도네' 라고 하였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욕심을 줄이며 잡다한 생각과 주변의 물건을 정리하면 정신이 안정되고 더위가 가실 것이다. 올여름도 움직임과 말은 줄이고 마음은 깨끗하게 유지하여 무더운 한 여름을 무사히 날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2011. 한 여름 소나무 집에서. 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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