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각이나 정자는 대부분 냇가나 계곡에 위치하여 주위 풍경과 잘 어울리는 장소에 짓게 마련이다. 흐르는 물이 없을 때는 연못을 조성하는 것이 대개의 경우다. 옛날의 큰 건물이나 사대부가의 별채 같은 곳도 연못을 끼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연못이 주는 운치는 건물의 품격을 살려줄 뿐만 아니라 물이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와 더불어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다스려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수많은 절경의 루와 정자가 있고 모두 나름대로의 역사와 인물을 자랑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다녀본 바로는 냇가를 끼고 있는 건물로서는 병산서원의 만대루가 훌륭하고 계곡을 끼고 있는 정자로서는 영덕 옥계계곡의 침수정이 뛰어나며 연못을 가지고 있는 정자로서는 세연정이 으뜸이라고 생각이 든다. 다만 세연정의 연못은 인공적인 것이긴 하나 그것을 뛰어넘는 자연스런 조형미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연못을 만들기 어려운 곳은 작은 석연지라도 배치하여 운치를 살리기도 했다.
시골로 이주하기 전부터 마음에 두었던 것 중의 하나가 집이 마련되면 한 쪽에 작은 연못을 만들어야겠다는 것이었다. 퇴임하기 전 학교에는 연암지라는 연못이 있었고 봄부터 여름까지 말 그대로 연과 수련이 볼만 하였다. 나는 연못 관리자를 자처하며 틈만 나면 그곳으로 나가 근방을 어슬렁거리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바쁘고 메마른 생활 속에서도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연못이 있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침 연에 대해 흠뻑 빠져 있을 때라서 더 그랬다. 연암지를 보면서 그 때는 이미 퇴임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지라, 시골에 들어가면 꼭 연못을 만들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집 주변과 마당 정리가 어지간히 끝나자 앞 쪽 밭 귀퉁이에 미리 준비 해놓은 자리에다 연못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거운 돌을 가지고 둘레를 쌓는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마당에 포그레인 작업을 할 때 구덩이를 파 놓았지만 깊이만 깊었지 아무것도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상태였다. 안쪽으로 돌을 쌓고 바깥을 둑으로 만들어야 했는데 무거운 돌을 옮기고 움직여 축대를 쌓는 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며칠 궁리 끝에 연못의 위치를 개울가로 옮겨 물고랑과 합치기로 하였다. 일도 덜며 밭도 늘어나고 모양도 더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연못과 물고랑은 낮은 돌로 경계를 만들고, 위쪽의 물고랑에서 물이 흘러 들어와 다시 개울로 빠져나가도록 할 생각이었다. 이미 파논 곳은 깊은 연못으로 새로 늘어나는 곳은 얕은 곳으로 수심의 차를 두도록 하면 더 나을 것 같았다.
구상만 하고 미루고 있다가 마당에 자갈을 깔고 밭을 손 볼 때 포크레인을 불러 연못을 다시 조성하였다. 돌을 쌓고 흙을 덮어 대략 형태를 갖춘 뒤 며칠 동안 개울과 연못사이의 경계를 만들고 입수구와 퇴수구 등 주변의 정지작업을 하고 보니 과연 그럴듯한 연못이 만들어 졌다. 규모가 크지는 않으나 아담하고 모양에 변화가 생겨 처음보다 훨씬 나았다. 물을 대어보니 자연스럽게 순환이 이루어졌다. 물을 채운 뒤 수없이 쳐다보면서 흐뭇한 기분을 만끽하였다.
연못이 과히 크지 않다는 것이 우선 마음에 든다. 소박하지만 나의 마음에 가장 잘 어울리는 크기다. 고랑과의 경계에는 땅을 팔 때 나온 자연석을 그 자리에 그대로 놓고 활용을 했는데 작은 산처럼 모양이 예쁘다. 가장자리 쪽 물속에도 작은 봉우리가 하나 잠겼다. 안방이나 데크에서도 잘 보이는 위치에 있다는 것도 마음에 든다. 이미 올해는 늦었으나 내년부터는 수련과 연을 심고 수생식물을 적당히 배치하면 보기가 좋을 것이다. 주변에 키 작은 나무를 두어 그루 심고 둑에는 큰 돌을 하나 옮겨 앉아서 볼 수 있도록 해야겠다. 아마 앞으로 나의 발길이 자주 이곳으로 올 것 같다.
사람이 집을 가꾼다는 것도 필요한 일 중의 하나일 것이다. 더군다나 새로 집을 지었을 경우는 더 그렇다. 그러나 연못을 만든다고 과도하게 힘을 쓰고 나니 보다 중요한 일은 못하고 작은 일에만 매어 사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조금은 저어한 기분이 들었다. 모양과 꾸밈에 너무 신경을 쓰고 있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자연에 순응하는 생활, 욕심을 덜어내는 삶, 스스로 해결하고 자족하는 삶을 생각하였지만 지금 나는 너무 많은 전기제품에 의존하고 있으며, 안락한 환경과 보기 좋은 모양만을 염두에 두고 일을 서두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제 이 정도에서 만족해야 겠다. 나무를 심고 밭을 일구고 완성되지 않은 부분을 손보는 것 외에 너무 많은 욕심을 부리지 않아야 겠다.
바쁜 사람의 동산과 연못은 가까이 있어도 즐기기가 어렵지만 한가한 사람은 멀어도 괜찮다고 하였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속에 동산과 연못을 가질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연못을 모양 만으로 만든 것은 아니다. 이제 연못가에 앉아 마음을 씻고 남의 허물은 잊고 매일 생기는 욕심을 버리려 한다. 연못을 보며 사람으로 인해 생기는 파문을 가라앉히고 세상의 이치를 곰곰이 따져 옳은 바를 취한다면 근심이나 걱정은 줄어들 것이다. 그렇게 비워진 마음으로 봄날의 빗소리를, 여름날의 풀벌레 소리를, 가을 낙조 속 실상사의 저녁 종소리를, 겨울의 바람소리를 들으며 자연을 가까이 해야겠다.
신묘 맹하. 송하산방에서. 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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