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우충충하다. 오랜만에 인월읍내로 목욕을 하러 나갔다. 오랜만이라 하는 것이 근 보름쯤 되는 것 같다. 읍내에 다녀 온 날이 아니라 몸을 씻지 않은지가 거의 그렇게 되었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참을 수 없어 나간 것이다. 근래 땀을 흘릴만한 힘든 일을 한 적이 없으니 그냥저냥 지내고 말았던 것이다. 여름에는 하루에도 서너 번씩 몸을 씻었는데 너무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날씨가 추워지면서부터 어쩐지 집에서는 몸을 씻을 마음이 잘 나지 않아 자꾸 미루게 된다. 여름에 자주 했으니 일 년 평균을 내면 그래도 하루에 한번 꼴을 되지 않겠느냐는 괴상한 계산까지 해보았다.
양치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루에 한번은 고사하고 마냥 미루다가 안 되겠다 싶으면 한 번 닦는 정도니 이것은 좀 심각한 문제다. 하긴 매일 먹는 음식이라는 것이 밥과 된장 그리고 김치를 크게 넘어서지 않으니 걸리고 남고 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처음에는 좀 그렇다는 기분이 들더니 지금은 자주 닦을 때보다도 오히려 입안이 더 편안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칫솔이 잇몸을 과도하게 자극하는 부분도 분명 있을 것이다. 나이 들수록 입안 관리를 잘하라는 말도 있지만 어쨌거나 짐승 중에 이빨 닦는 것은 사람밖에 없다는 우스꽝스러운 핑계거리를 생각하며 버티어 본다.
겨울이 되면서 일어나는 시간도 많이 늦어졌다. 아침에 눈을 뜨면 아직 어둡고 추운데 굳이 일찍 일어날 필요가 있겠느냐는 생각에 밖이 훤해질 때까지 뭉기적거리다 8시쯤에나 일어난다. 식사준비를 하다 보면 보통 아홉시가 넘어서야 아침을 먹게 된다. 여름에는 동네 농부들 흉내 내느라 새벽같이 일어나 별일이 없어도 논밭을 한 바퀴 둘러보고 풀을 매거나 밭일 등을 하였는데 지금은 일찍 일어나도 당장 해야 할 일이 없다. 일찍 일어나 책을 읽는다든지 명상을 한다든지 체조를 한다든지 할 수도 있겠지만 본래 나의 성격이 아침형이 아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한다는 것이 나는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이다. 어쨌거나 자연의 시계에 충실해지고 있는 셈이다. 아직도 도시적 습관을 버리지 못해 저녁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늦기는 하지만.
게으름을 피우다 보니 어쩌다 일이 생겨도 생각뿐 자꾸 미루게 된다. 바쁘지는 않지만 그래도 해야 할 일은 늘 있게 마련인데 기온이 떨어지면서 움직이는 것이 귀찮아 지고 몸을 사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계획했던 목공작업 같은 것도 하우스 제작이 늦어지면서 손도 못 댔다. 이렇게 별 하는 일 없이 집 주변만 맴도는 일상이지만 그래도 하루하루 시간은 잘 간다. 벌써 12월이 되지 않았는가? 이번 겨울을 잘 보내면 네 계절을 온전히 보내게 된다.
사람도 다른 짐승과 마찬가지로 겨울에는 몸의 움직임을 줄이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체온을 유지하기 위한 에너지 소모가 여름보다도 겨울에 더 크다는 얘기도 있지만, 여름에는 힘껏 일을 하는 대신 겨울에는 활동을 줄이고 힘을 비축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일상은 마치 비닐하우스 안에서 사계절 재배되는 채소와 마찬가지다. 대부분 자기 의지대로 살아간다고 생각하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거대한 구조와 거스를 수 없는 힘이 사람으로 하여금 계절도 없이 끊임없이 일을 하도록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여름에는 냉방장치로 겨울에는 난방장치로 더위와 추위를 이겨내며, 더욱이 야간에는 환한 조명까지 동원해 놓고 쉼 없이 일을 해야 한다.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그렇게 해서 얻은 편리와 안락함은 어느 정도나 되는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가기 힘들다고 주장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생각해보자. 자동차, 아파트, 보험, 여행, 교육, 명품, 미용, 전기 및 전자 제품 등... 이런 것들이 없으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없는 것인가?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물건들이고 장치들인가? 또한 인간의 가장 잘못된 습성이면서 스스로를 옭아매는 치명적인 족쇄가 바로 상호간 경쟁이다. 그것이 바로 남에게 뒤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이제 와 반성하건데 지금까지 나의 삶도 남들에게 뒤 떨어지지 않기 위한 부끄러운 발버둥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필요해서라기보다 남이 가진 만큼 가지고 싶고, 남이 하는 만큼 하고 싶고, 남보다 못한다는 소리 듣고 싶지 않은 헛된 욕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몇 년 전 필요에 의해서 집을 팔았는데 한꺼번에 세 가지가 없어졌다. 물론 집이 없어졌고 따라서 빚도 없어졌으며 부수적으로 걱정도 없어지는 것이었다. 집값이 오르던 내리던 별 신경 쓸 일이 없어졌으며 부금 걱정도 없어지고 빚을 갚고 나니 이자 낼 일도 없고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었다. 그 때 중요한 것을 깨 닫았다. 버리는 만큼 생기는 것도 있더라는 것이다. 물론 집 없는 사람들에게는 허황된 얘기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미 대한민국은 주택과잉의 나라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고가의 터무니없는 주택가격은 사람들의 욕망과 허영이 만들어낸 거품일 뿐이다.
교육문제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의 교육문제가 어제오늘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도대체 이다지도 자식교육에 목을 매는 나라가 또 어디에 있는가? 각 가정마다 교육비의 비중은 또 얼마나 큰가? 그런데 그 밑바닥의 정서를 잘 살펴보면 결국 이것도 남한테 뒤떨어지지 않기 위한 발버둥임을 알 수 있다. 아이는 아이대로 경쟁하고 어른은 어른대로의 경쟁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아이나 부모나 모두 피해자다. 그러나 불행히도 자기 덫에 치인 피해자들이다. 자식교육이란 사람다운 사람, 건강하고 성실하며 따뜻한 사람, 자주적이고 책임감이 있는 사람을 만드는데 촛점이 맞춰져야지 성적이 남보다 앞서는 아이를 만드는 것이 아니잖은가? 그것은 아이가 스스로 해야 할 일이고 책임져야할 일이다.
더 이상 욕심 부리지 말자. 하늘을 나는 새는 먹을 것 입을 것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느님께서도 이르지 않았는가? 그것은 새가 더 잘 입고 더 많이 먹고 더 똑똑한 새끼를 낳고 다른 새보다 더 오래 살겠다고 욕심 부리지 않기 때문이다. 남보다 더 많이 가지겠다고, 뒤처지지 않겠다고 욕심부리지 않는다면 부족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명품이라고 하는 고가의 제품에 연연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잘 헤아려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의 이러한 변명을 배부른 소리라고 비난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입장과 위치에서 일종의 가진 것을 상당한 부분 포기한 사람이다. 물론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다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설혹 어려운 환경에 처한다고 할지라도 다시 과거의 몰염치하고 구차한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나는 올 겨울 간단한 생태 화장실을 짓고 닭장을 만들고 퇴비장을 만들 생각이다. 뒤쪽 밭으로 올라가는 돌계단도 만들어야겠다. 아내의 화장대도 하나 만들어 줄 생각이다. 그동안 소홀히 했던 책을 가까이 하고 글도 본격적으로 연습해 볼 생각이다. 장담할 수는 없지만 위쪽에 사는 지리산 오카리나 소년에게 오카리나 연주도 배워보고 싶다. 한동안 소원했던 친구나 친인척도 몇 군데 방문해 볼 계획이다. 그러고 보니 할 일이 많다. 그러나 반드시는 아니다. 해보겠다는 생각이다. 안되면 내년 봄에 하면 될 것이다.
동물은 대체로 몸이 크고 느릴수록 오래 산다. 하루살이의 몸짓을 보라. 얼마나 바쁜가? 가능한 한 느긋하게 생각하고 차분하게 움직이는 것이 그만큼 몸에도 이로울 것이고 오래 살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겨울을 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움직임을 줄이고 몸을 온전하게 보존하는 일이다. 세상이 좁다고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많지만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가 않다. 낮에 일하고 밤에 자고, 좋은 계절에 일하고 겨울에 쉬고, 필요한 만큼만 먹고 쓰고 일하는 것이 가장 훌륭하게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겨울 마음껏 게으른 생활을 해보겠다. 목욕을 안해도, 끼니때 마다 이빨을 닦지 않아도, 늦잠을 자도 누가 간섭할 사람도 없다. 어떤 옷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걱정할 필요도 없다. 누구에게 잘 보일 이유도 없다. 건강한 몸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그것도 나의 운명이다. 오로지 소나무처럼 꼿꼿하고 맑은 정신만은 잃지 않고 유지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년엔 더 열심히 일을 하겠다.
신묘, 겨울 소나무가 푸른날. 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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