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과 함께

산내통신

쥐불을 놓으며...

방산하송 2012. 2. 29. 19:57

 

오후 늦게 네 스피커에서 이장님의 안내 방송이 흘러 나왔다. "모레 일제히 쥐불을 놓습니다. 논두렁 밭두렁 그 전에 연기내지 마세요." 산불 때문에 날을 잡아 일제히 불을 놓을 예정인 모양이다. 아마 행정지시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오늘 집 앞쪽 논 비탈을 정리하면서 이미 불을 놓아 버렸다. 불 단속까지 마친  참이었다. 마침 날씨가 따뜻하고 바람도 불지 않아 앞쪽 밭 경계를 이루는 턱에 잔뜩 뒤엉켜 있던 풀과 찔레나무 등을 걷어내고 불을 놓았던 것이다.

 

불을 놓고 지키고 있자니 옛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옛날에는 보름 전 쥐날을 전후해 동네마다 여기저기 논밭에 불을 놓고 태웠다. 잡풀을 제거하고 병충해도 제거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린 것이다. 봄을 맞고 새 농사를 지을 준비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대미인 보름날은 달집을 태우고 불놀이를 하였다. 마른 삼대 같은 것에 불을 붙여 들고 다니며 놀기도 하고 나중에는 깡통에 구멍을 뚫고 줄을 매단 후 빙빙 돌리면서 뛰어다니며 놀았다. 장난 끝에 눈가를 데인적도 있다. 어렸을 때는 그런 것들이 그렇 신나고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보름 이후로는 불을 놓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아마 산불에 대한 염려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요즘은 날이 풀어지고 난 뒤에야 쥐불을 놓기 때문에 그 여파로 종종 산불이 발생하기도 한다. 워낙 산불의 피해가 커 한 때는 지역 행정기관장의 목이 산불에 달려있다고도 했다.

 

나도 어렸을 적에 산불을 내본 적이 있다. 학교갔다 오는 길이었다. 양지바른 묘 등에서 조무래기 친구 서넛이 앉아 놀다 심심하던 차에 장난삼아 잔디밭에 불을 붙여보자고 했다.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처음에는 별로 였는데 마른풀에 불이 붙어 나가자 아뿔사 순식간에 불어나더니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되버렸다. 산으로 옮아 붙기 시작하자 우리는 놀래 정신없이 도망쳐 동네에 숨었다. 산에 연기가 나자 온 동네 사람들이 몰려가 겨우 불을 껐다. 크게 번지지 않아 천만다행이었지만 우리는 다음날 학교에 가 선생님한테 죽도록 맞았다.

(맞을 짓을 한 것이니 하소연 할데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날이 풀리고 해토가 되면서 봄 농사 준비를 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거름도 내고 논둑이나 밭둑의 부실한 곳은 미리 손보고 비탈이나 언덕바지 겨우내 얼었다 녹은 곳들도 손을 보아야 한다. 작년 농사 후 남은 것들도 치우고 정리 해놔야 한다. 그런데 막상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손을 놓고 있는 실정이다. 작년에 신청한 퇴비가 오늘 배급이 되어 저녁에 실어다 놓은 것이 전부다. 마당가에 땅이 녹으면서 여기저기 무너져 내리고 가라앉은 곳들이 많지만 아직 완전히 해동이 안 된 것 같아 역시 미루고 있다.

 

앉아궁리만 하고 있는 것이다. 3월 초 나무 심기를 한 후 우선 감자부터 심고, 옥수수, 고추 모종내고, 콩, 깨, 들깨, 호박과 오이 구덩이 준비하여 심고, 텃밭에 부추 밭도 새로 만들어야 한다. 상추, 열무, 얼갈이배추, 파 등과 가지, 토란, 토마토, 파프리카나 피망, 고구마 등도 넉넉하게 심고, 논에 모낸 뒤 앞밭에 양파와 마늘 수확하고 감자를 캐야 한다. 잠시 숨을 골랐다가 더위가 물러나면 가을 농사 준비하여 무 배추 심어 놓고, 벼 타작한 후 고추 따서 말리고 콩, 들깨, 고구마 수확하고 다시 마늘 양파를 파종하여야 한다. 겨울이 닥치기전 무배추 거둬들여 김장까지 마치면 드디어 모든 농사가 끝날 것이다.

 

올해 농사의 가장 중심은 고추다. 작년에 실패한 것을 만회하여 올 가을엔 고추농사로 다소간의 수익을 올릴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거름이지만 아직 퇴비를 본격적으로 만들지 못했으니 구입해 쓸 수밖에 없다. 병충해 방지도 효소나 목초액 등 자가 제조한 것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데 잘 될는지 모르겠다. 또 올해는 과일나무를 비롯해 두릅나무, 엄나무, 가죽나무 등을 구해 심고, 뒷밭 위쪽에 표고 밭도 만들고 앞 화단도 조성해야 한다. 도라지와 더덕, 고사리도 심을 계획이다. 더군다나 올해는 직접 메주를 쑤고 장을 담글 계획이니 그것도 꽤 만만치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초보자의 좌충우돌이지만 뭔가를 심고 가꾼다는 것이 신기하게도 나에게는 늘 즐거움으로 생각되니 큰 다행이다. 물론 제대로 된 농사라 할 수도 없고 일정한 수익을 얻고자 하는 것도 아니니 동네사람들에게는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놀지않고 흉내에 지나지 않지만 그들과 같이 열심히 일한다는 것은 인정받은 것 같다. 몇 년 더 경험이 쌓이면 나도 농사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잔뜩 긴장하며 맞이했던 겨울도 어느덧 끝나간다. 월동비가 만만찮게 들었고 아직 추위가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지만 오는 절기는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우수가 지나고 경칩이 내일모레다. 이제 거의 일 년을 다 보내게 되었다. 지난봄부터 시작해 겨울까지 났으니 무사히 첫해를 치른 셈이다. 아직까지도 처음의 기분은 다 사라지지 않았으나 그래도 혼자 생활은 많이 익숙해졌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들뜨지 않고 그러나 지치지 않고, 실망하거나 싫증내지도 않고 내내 무던하게 하루하루를 잘 보냈으면 좋겠다. 어차피 여유를 부리고 놀기 위해 온 것은 아니잖은가? 심고 가꾸며 자연과 함께하는 생활을 희망한 것이지 흔히 생각하는 전원생활을 꿈꾸었던 것은 아니다.

 

마침 오늘은 대학교 여자 동기들이 다녀갔다. 크게 고생하거나 굴곡이 없어서인지 젊었을 때의 모습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모두 할머니 소리를 듣는 나이가 되었다. 그들도 이곳의 조망과 집의 형태와 나의 생활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역시 생활의 기반이 도시이기 때문에 도시인의 입장에서 판단하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제의 생활은 비바람과 흙속에서 거친 손과 땀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속에서 희열과 감사를 느낀다는 것도 쉽게 이해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반가운 손님들이었지만 둘레길과 실상사 쪽으로 길 안내만 해주고 일 때문에 동행은 하지 못했다.

 

그들이 갔다오는 동안 불을 놓은 곳을 다시 정리하고 나무를 몇 주 심고 마무리 하였다. 보기가 한결 개운해졌다. 인동초가 뜨거운 불에 무사할지 모르겠다. 많이 상하지는 안했으면 좋겠다. 이미 쥐불을 놓으면서 올 해 농사도 시작되었다. 겨울동안 편하게 지냈는데 다시 시작이다. 실내에서 하던 작업들도 마무리를 해야겠다. 새로이 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아 한편 기대가 되기도 한다. 날이 풀리면 풀과의 전쟁도 다시 시작될 것이다. 풀 속의 모기나 벌레와도 싸워야 한다. 나무 옮겨 심을 생각만 해도 벌써 머리가 아픈데 무슨 수로 다 해낼 수 있을 것인지 걱정스럽기도 하다. 그래도 지난 한 해 조금이나마 요령을 얻었으니 좀 수월하지 않겠는가? 하다 못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섣부른 경험이 화를 부르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임진 새봄 쥐불을 놓은 날.      소은

 

 

'산내통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송하산방의 새 주인  (0) 2012.04.12
나무를 심으며  (0) 2012.03.29
첫눈이 내리다. 새 생명과 함께...  (0) 2011.11.28
시제에 참석하다.  (0) 2011.11.15
마늘을 심다.  (0) 2011.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