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과 함께

지리산을 보며

호우지시절 (好雨知時節)

방산하송 2011. 4. 27. 09:43

 

두보의 '춘야희우(春夜喜雨)'를 보면 '좋은 비는 때를 알아 스스로 내리니 봄을 맞아 만물을 소생시킨다(好雨知時節 當春乃發生 隨風潛入夜 潤物細無聲)'고 하였다. 그 싯귀가 좋아 호우지시절이라는 글귀를 수없이 써 보았는데 얼마전에는 영화의 제목으로도 씌여져 유명해졌다. 일기예보는 황사비가 내리고 돌풍과 뇌우도 나타날 것이라고 하였지만 지금은 포근한 봄비가 촉촉하게 내리고 있다. 그야말로 호우지시절이다. 바깥일을 멈추고 방안일을 정리하면서 보니 건너편 삼정산 중턱으로 구름이 막 피어오른다. 오랜만에 편안이 앉아 비오는 풍경을 감상하였다. 들녁에 사람도 없고 오가는 차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저 비소리만 고즈녁하게 들린다. 비가 흡족히 내려 나무들마다 새 잎들이 윤기를 내며 생기를 내뿜는다. 생명을 소생시키는 비다.

 

어머니께서 들리셨다가 하루저녁 주무시고 오늘 다시 돌아가시겠다고 한다. 옥수수씨와 장류를 가지고 오셨는데 한 이틀 쉬었다 가시라고 해도 심심해서인지 그냥 가시겠다고 했다. 당신은 늘 농사짓는 일의 귀찮음에 대해 이야기를 하신다. 그러나 그런 일을 하려고 이곳으로 온 것인데 그 마음을 모르시는 것 같다. 아니 이해를 못하시는 것 같다. 나는 가만히 앉아 앞 산을 쳐다보고만 있어도 하루가 잘 가는데, 어머니는 티브이나 마을 회관에서 모여 노는 것에 익숙해져 마땅한 일거리도 없고 심심하신 모양이었다. 처음으로 어머니 앞에서 나도 앞으로 살 날이 길어야 한 이십년쯤 아니겠느냐는 말을 했다. 한동안 아무 말씀이 없었다. 비가 오지 않으면 쑥을 캐 나중에 떡을 해먹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니 대신 뒷밭에 달래가 많다며 캐다가 양념장을 만들어 놓으셨는데 맛이 좋다. 요즘은 모든 나물이 제철이다. 산나물류 뿐 아니라 두릅, 가죽, 머위, 고사리 등도 한 맛을 내는 것들이다.  

 

 

 

 

부산의 동생이 새 집을 지었으니 뭔가 하나 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전화가 왔다. 시골에 집을 지으니 자기의 꿈이 이루어진 것처럼 기쁘다는 것이다. 집을 지을 때 나는 어머니와 동생들 생각도 많이 했었다. 그들이 오고 싶을 때 언제라도 와서 쉬어가고 머무르다 갈 수 있는 곳, 가고 싶을 때 갈 수 있는 시골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러나 그들에게 부담을 지우기는 싫고 와서 자고 갈 이부자리나 몇 벌 준비하고 좀 큰 나무를 한 그루씩 사서 심으라고 했다. 어차피 조경 겸 큰 나무가 몇 그루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묘목은 내가 구입하거나 야산의 작은 나무들을 구해 심을 예정이다. 서울의 동생도 뭔가를 해 주겠다고 하여 관리기나 한 대 사라고 했지만 그러나 그것도 그만두어야 겠다. 가격도 만만치 않고 어차피 내손으로 직접 가꾸기로 한 이상 과도한 농기계를 구입할 필요가 있겠는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분할측량을 하고 갔다. 설계사무소나 집짓는 사람들이 일에 대한 책임감이 많이 부족한 것 같다. 이미 이루어져야 할 일이고 준공허가도 났어야 하는데 자기일 처럼 챙기고 안내를 제대로 하지 않아 자꾸 일이 늦어진다. 집을 너무 앞으로 당겨 짓는 바람에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 법적인 문제는 없겠다고 하였다. 오늘도 전화를 두번이나 해 채근질을 해서 빗속에 나온 것이다. 대지와 농지 분할에 대한 행정처리가 빨리 이루어져야 준공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시기를 놓쳐 나무를 제대로 심기는 틀렸고 뒷 논에 벼 농사를 지어보려고 생각했는데 모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미 모 신청이 다 끝났고 농협에서도 어쩔 방법이 없다고 한다. 육모장으로 직접가 알아본 결과 마지막 차에 오면 일부 모가 남을 수가 있으니 그 때 와 보라고 했다. 한 마지기도 한 되는 땅이니 여기저기 얻어다 심어도 될 것이라는 동네분의 말씀이나 이제 들어온 사람이 누구에게 모를 달라고 할 것인가?

 

주문한 소형 스피커가 왔다. F.M 방송을 들으려고 새로 작은 오디오를 구입하고 스피커는 오래전부터 사용하던 것을 그대로 쓸까해서 들고 왔는데 낡아서 소리가 샜다. 열어보니 대형 우퍼 주변이 삭아 떨어지는 바람에 볼륨을 높이거나 저음에서는 감당을 하지 못했다. 새로 구입한 스피커는 영국 캐슬사의 제품인데 크기는 작지만 음은 만족할만 하였다. 아마 운이와 더불어 나의 가장 가까운 벗이 될 것이다.

 

음악을 들으며 주방 뒤를 보니 창너머로 뒷밭의 연두빛 풀잎이 비를 맞아 더욱 싱싱하다. 그러나 모든 것은 때가 있으니 풀메는 것도 시기를 놓치면 나중에는 주체를 못하게 될 것이다. 농사일도 시기와 때를 맞춰 심고 뿌리고 가꾸어야 한다. 사람의 인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각각의 시기에 맞춰 배우고 준비하고 가꾸지 않으면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다.

 

내일은 인월장에 나가 유실수 묘목을 몇 그루 더 구입해 뒷밭에 묻어 놓고 옥수수도 심어야 겠다. 날이 좋아지면 지금부터는 본격적으로 마당 정리를 해 나가야 할 것이다. 뒷 마당에 수도도 놓고 장독대로 만들어야 하며 퇴수로도 정리해야 한다. 할일이 많다. 농네 분들에게 인사도 한 번 해야할텐데 이장님과 의논을 해보야겠다. 

아직도 비는 그치지 않고 구름이 앞산을 가렸다 나왔다 감싸고 도는 품이 마치 수묵화 같다. 넉넉하게 내리는 봄비가 그동안 이것저것 바빴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주는 날이다.  

 

2011. 비오는 봄날.  송하산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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