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과 함께

지리산을 보며

살아있는 것들과 친해지기

방산하송 2011. 9. 9. 09:58

오늘 아침 바깥을 들러보고 들어오는데 갑자기 무엇인가가 팔뚝으로 털썩 뛰어들었다. 청개구리였다. 그리고 그 순진한 눈으로 말똥말똥 쳐다보는 것이었다. 나 참, 여기가 어디라고 달라붙는 거냐? 손 안에 쥐고 들어와 잠시 사진을 찍고 돌려보냈다. 주변이 논과 밭이어서 그런지 청개구리들이 참 많다. 얼마 전 밤중에는 데크로 나가려고 문을 여는데 느닷없이 얼굴에 무엇이 철썩 붙는 바람에 깜짝 놀랬는데 역시 청개구리였다.

 

청개구리는 일반 개구리와는 달리 몸매가 작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상당히 귀엽다. 눈은 투명하고 맑은데 연둣빛을 띈 피부는 대단히 부드러우며 촉촉한 발바닥은 유리 창문 같은 곳에도 거뜬히 달라붙을 수 있다. 무엇보다 사람이 사는 곳에 가까이 서식하기 때문에 자주 볼 수 있다는 것이 더 친근감이 간다. 청개구리가 울면 비가 온다는 속설이 있으나 비율 약 60% 정도라고 하니 비가 올 확률이 다소 높기는 하지만 비가 오지 않아도 청개구리 울음소리는 곧 잘 들을 수 있다.

 

시골에 살다보니 곤충이나 벌레 등 많은 동물들과 만나게 된다. 연못을 만들어 놨더니 엊그제는 고라니가 와서 물을 먹고 갔는지 발자국이 선명하였다. 금붕어를 스무 마리 정도 사다 넣었는데 곧 큰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서너 마리가 떠내려가고 지금은 열여섯 마리가 옹기종기 몰려다닌다. 처음에는 경계하느라 물밑으로 숨어 그림자도 안 보이더니 먹이도 주고 아침저녁 자주 갔더니 이제는 연못가에 가면 멀리서도 사람 있는 쪽으로 몰려든다.

 

올해는 비가 자주와 그런지 모기나 날벌레들은 크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거미는 여기저기 귀찮도록 줄을 쳤고 지네도 몇 번 보았으며, 장마철에는 사래기라고 하는 벌레가 무시로 바깥벽과 집안까지 들어와 참 귀찮았는데 자갈을 깔고 난 뒤에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어쨌든 시골이란 이렇게 많은 벌레와 곤충과 새나 짐승들과 어울려 살 수 밖에 없는 곳이다. 그런데 그런 생물들과 가까이 지낸다는 것은 그렇게 쉽지가 않다.


오래 전 김관규 선생과 여름을 맞아 둘이서 섬으로 여행을 가려고 목포에 들른 적이 있다. 저녁을 홍어로 먹겠다고 오래된 탁주 집을 찾아 들어 갔었는데 내 모자 위에 잠자리가 앉아 있다고 하였다. 모자를 벗어보니 어쩌자고 술집까지 따라 들어왔는지 너무 작고 가는 잠자리 한 마리가 윗쪽에 꼭 붙어있는 것이었다. 그 모습이 예뻐 가지고 있던 노트에다 스케치를 해 놓았다. 몇 번의 비슷한 경험이 있다. 한참 산에 많이 다닐 때다. 배내골 주암계곡을 좋아해 여러 번 갔었는데 나는 항상 길 아래쪽에서 계곡을 타고 올라갔다. 한참을 올라가다 물가에 앉아 쉬는데 팔랑팔랑 나비 한 마리가 내 손등에 앉는 것이었다. 나는 도망 갈 것 같아 급히 카메라를 꺼내들고 한 손으로 셔터를 눌렀는데 잘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의외로 나비는 얼른 날아가지 않고 손등에서 손바닥으로 팔뚝으로 천천히 옮겨 다니며 노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차분히 초점을 맞추어 사진을 몇 장 찍을 수가 있었다. 중국의 아미산에 갔을 때도 그랬다. 아미산은 나비 특별보호구역으로도 유명한 곳인데 산 정상에 올랐다 걸어서 내려오는 도중에 나비 한마리가 역시 손에 앉았다. 급히 일행을 불러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하였는데 그러고도 한 십여 분이나 같이 산을 내려왔다. 지난 여름에는 밭에서 일을 하는데 갑자기 매미소리가 요란하였다. 응? 밭 가운데 웬 매미? 하고 들러보았는데 막상 매미소리는 내 머리 위에서 나고 있었다. 모자 위에 앉은 것 같았다. 나를 나무로 생각했나?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음, 이제 새만 날아와 앉으면 되겠구나 하는 망상을 하였다.

 

 

대체로 짐승이나 곤충은 본능적으로 자기보다 크거나 강한 상대에게는 접근하지 않는다. 그런데 간혹 나비나 잠자리 같은 곤충들은 사람의 짐이나 가방 또는 신체에도 멋모르고 앉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특별히 그 사람이 좋아서 접근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새나 짐승 물고기와 같은 것들은 쉽게 의심을 거두지 않는다. 위협적이지 않다고 판단이 되고 서로 교감이 통해야 비로소 다가가는 것이다. 중국 고사에 어느 어부가 바닷가에 나가면 늘 갈매기들이 주변에 모여 들었는데 어느 날 한 마리 잡아야지 하는 마음을 먹고 나갔더니 그 날은 갈매기가 아예 접근도 하지 않더라는 이야기가 있다. 아무리 표를 내지 않더라도 사람의 마음가짐이나 품은 생각은 자기도 모르게 겉으로 드러난다는 말이며 그만큼 짐승들의 본능적 감각은 예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얘기이기도 하다.

 

몇 년 전 선암사에 갔을 때 어떤 스님의 손 위에 새가 앉아 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느냐고 물었더니 그냥 와서 놀다 간다는 말이었다. 아마  스님의 몸과 마음에서 저절로 배어 나오는 무심 무욕의 심성을 새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짐작을 해 보았다. 나무나 돌이나 바람처럼 스님도 똑 같은 자연의 일부로 여기기 때문에...,  결국 인간이 자연의 일부가 된다면 새나 짐승들과도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서로 어울리고 교감을 나누며 사는 것도 가능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생각난다. 어린 시절 책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는데 새와 나비와 모든 짐승들이 그의 어깨와 발밑에 와서 놀았다는 것이다. 어린 마음에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더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추운 겨울날 거지에게 옷을 모두 벗어주고 자기는 알몸으로 떨면서 집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적인 성인이며,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 오직 신앙심으로만 살았던 분이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 본적이 있다. 그 기억으로 나는 세례를 받을 때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본명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심성을 닮고 싶어 수첩에 늘 성인의 사진을 넣어 다닌다.

 

프란치스코 성인처럼은 아니지만 시골생활을 하면서부터 자주 이런 생물들을 가까이 접하게 되고 동시에 그 역할과 중요성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보게 된다. 작은 것, 미미한 생물이라 할지라도 다 각자의 역할이 있고 살아가는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생물들의 활동과 관계 속에서 인간도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닌가? 어느 것 하나라도 없어지거나 쇠퇴하면 결국은 이상이 발생하고 문제가 된다는 것을 이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늘 눈앞의 이익에만 정신이 팔려 무지막지한 횡포를 부리는 경우가 많다. 멀리 보지 못하는 인간의 교만과 어리석음 때문이 아니겠는가?

 

인간만이 살아남은 지구를 상상해보자. 모든 동식물은 자생하지 못하고 인위적인 것만 남아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 끔찍한 상황이란 무시무시한 재앙이며, 아마 인간은 그 전에 벌써 멸종되고 말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지금 그런 막다른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탄성은 반드시 한계치가 있다. 아무리 복원력이 뛰어난 것도 어느 순간 임계점을 넘어서면 탄성을 잃고 만다. 다시는 복원되지 않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한계점을 향해 우리가 가고 있다는 염려를 지울 수가 없다. 한계점을 넘는 순간 모든 것이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인간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말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을 소홀히 하는 순간 우리는 나락으로 추락할 수 있으며 종내는 더불어 망하는 길이 될 수도 있다.

 

2011. 벼가 누렇게 익은 초가을. 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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