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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내통신

병신 모 축

방산하송 2016. 6. 12. 23:00


어제 어머님 제사를 모셨다. 재작년 기제사부터는 한글 축을 쓰고 있는데, 하루 전 쯤 초안을 잡고 기일에는 지방과 축을 세필로 정성스럽게 옮겨 적는다. 상차림을 간소화하는 대신 축이 중심이 되도록 가능하면 지난 일 년 동안의 일들을 상세히 고하고 돌아가신 분에 대한 소회를 밝히는 형태다. 이것은 올 해 어머니의 축인데 동생들이나 가족들이 읽어보라고 올린다. 그 아래 아버지의 축도 같이 올렸다.



병신 모 축


유세차 병신 오월 무오삭 팔일 을축 효자 장호 어머님 영전에 아룁니다.

해가 바뀌어 다시 어머님 돌아가신 날이 돌아왔습니다. 그 동안 안녕하셨는지요?


벌써 여름이 된 듯 날이 뜨겁습니다. 나무나 꽃들이 왕성히 크고 채소 등이 잘 자라며 마늘 양파도 작황이 좋습니다. 양파는 수확을 했습니다. 감자는 시원찮은 것이 씨감자를 잘못 산 모양입니다. 며칠 전에는 콩을 심었는데 새가 입을 대어 걱정입니다. 참깨농사는 모종이 잘 안 올라와 별 기대를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올해는 다시 쌀농사를 지으려고 논을 손보고 지난 달 말에 모를 심었습니다.


작년 하우스로 인해 속이 많이 상했는데 덕분에 앞 담장을 새로 쌓고 화단을 만들었으며 내친 김에 다른 곳도 손을 보고 울타리를 조성해 집 주변을 모두 정리했습니다. 이제는 마무리가 다 되었고 마음도 다시 편안해졌습니다.


영근이 에미는 올해 퇴직을 하였습니다. 영근이는 아직도 시험 준비 중이고 영제도 졸업 후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어 늘 걱정입니다. 손자들 모두 제 앞길을 잘 열어 나갈 수 있도록 어머님 부디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동생들이나 외손들도 다 그만그만 지내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한 번씩은 원망스런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들대로 힘들겠지만 여의치 못한 동생들을 지켜보는 저도 참 힘이 듭니다. 그러나 사람의 연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이오니 아무쪼록 서로 돕고 챙겨가며 살아가도록 하겠으니 어머님께서도 잘 보살펴 주십시오.


어머님이 돌아가신 이맘쯤은 늘 바쁩니다. 돌아가시던 해 상을 치르고 돌아와서는 얼마나 허둥댔는지 모릅니다. 어머님이 남겨놓은 농작물까지 거두느라 무척 힘들었는데 덕분에 농사일을 많이 배우기도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 농사를 혼자서 어찌 감당하셨는지 한 번도 제대로 도와드리지 못한 것이 지금껏 죄송스럽고 마음에 걸립니다.


어머님, 부족하지만 이승의 일이란 살아있는 저희들의 몫이오니 이제 지난날의 구업은 다 잊으시고 부디 편안히 잘 지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이 초라한 차림 용서하시고 기꺼이 흠향하시길 바랍니다. 늘 어머님의 명복을 빌겠습니다.



병신 부 축


유세차 병신 사월 기축삭 십팔일 병오 효자 장호 아버님 영전에 아룁니다.

해가 바뀌어 또 아버님 돌아가신 날이 돌아왔습니다. 그 동안 안녕하셨는지요?

벌써 여름이 된 듯 날이 뜨거워졌습니다. 갈수록 절기가 빨라지는 것 같습니다.


엊그제 심은 채소 등이 쑥쑥 잘 크고 있고 마늘 양파도 아주 좋습니다. 올해는 다시 쌀농사를 지으려고 논을 손보았습니다. 며칠 뒤에 모를 심을 계획입니다. 작년 가을 집 앞쪽 하우스 쪽에 담장을 쌓고 화단을 새로 만들었으며 옆으로도 대나무와 개나리를 심어 집 주변을 모두 정리했습니다. 이제는 거의 마무리가 다 되었고 마음도 다시 편안해졌습니다. 다만 올 봄까지도 꽃과 나무를 심고 손을 보아 주느라 결국 아버님 묘소에 나무라도 몇 주 심겠다는 계획이 또 미루어지고 말았습니다. 내년 봄에는 꼭 단장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영근이 에미는 올해 퇴직을 하였습니다. 그동안 수고가 많았습니다. 영근이는 아직도 시험 준비 중인데 어서 빨리 제자리를 잡았으면 좋겠습니다. 영제도 졸업을 하고 지금은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둘 다 걱정입니다. 손자들 모두 제 앞길을 잘 헤쳐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동생들도 다 그만그만 지내고 있습니다만 종길이 에미나 현호는 아무래도 걱정이니 저도 마음이 편치 않고 답답할 따름입니다. 그저 내 한 몸 분수껏 잘 살아 왔으니 그것만으로 감사하고 말 일인지, 사람의 일이라는 게 욕심껏 되는 것이 아니니 체념하고 말 것인지, 집안일을 생각하면 늘 안타까운 심정일 뿐입니다. 아무쪼록 서로 돕고 나누며 살아가도록 하겠으니 아버님께서도 저승에서나마 이들의 앞날을 잘 보살펴 주십시오.


세상은 늘 어지럽습니다. 사람들의 인심도 그렇거니와 특히 젊은이들이 살아가기가 녹녹치 않습니다. 정치가 올바르지 못하고 경제도 오리무중인데 잊을만하면 한 번씩 큰 일이 벌어지니 나라 돌아가는 판세가 우습습니다. 그러자니 갈수록 없는 사람들만 더 어려워지는 실정인데 그러면서도 툭하면 서로 비난하고 싸우기가 일쑤입니다. 참으로 걱정스럽습니다.


아버님, 아버님이 세상을 놓으실 때는 무슨 생각이셨든가요? 부질없는 세상살이에 미련이 남으시던가요? 모든것을 버림에 홀가분하시던가요? 사람의 잘나고 못남이 이 세상에서만의 일이라면 좋겠습니다. 죽어서는 너나없이 같은 처지에 놓이는 것이 아니던가요? 그러므로 세상의 망자들이 모두 천국에 이르고 이승의 악인도 죽어서는 다 천사가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왕의 제 신들이 말한 바대로라면 죽음은 곧 해탈이요 축복에 이르는 길이라 하였으니 아버님께서도 늘 평안한 가운데 영혼의 안식을 누리시기 바라며 오늘 이보잘 것 없는 음식 용서하시고 즐거이 흠향하기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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